지난이야기/하얀기억속에...

각주구검

상산솔연 2025. 1. 3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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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구검

- 흘러간 첫사랑에 대한 단상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뱃전위에 칼을 떨어뜨린 자리를 표시해 두고
그 자리에서 칼을 찾으려 하는 어리석음처럼.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마음한 구석에 추억은 여전히 그시절의 푸릇한 감정을 찿고 있다 
내 마음속에 새겨진 그녀와의 추억은 서른 다섯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

대학교 4학년이었던 그 봄날, 도서관 창가에 앉아있던 그녀를 처음 보았다.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도 선명하다. 
책상 위에는 국문학 서적 펼쳐져 있었고, 그녀는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다가, 점차 책과 음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 다른 취향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자주 한강변을 거닐었다.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세었고, 미래에 대한 각자의 꿈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우리는 젊음의 순수한 열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나는 군입대로 그녀 곁을 떠났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에게 '잘 지내'라는 말만 남긴 채 헤어졌다.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나는 속으로 축하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가정도 이루었다. 
하지만 가끔 그녀와 같이한 여행지를 지나치게되면, 그때의 기억이 물살을 타고 흘러온다.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의 한구석에 그녀와의 추억을 새겨두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지방의 한 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어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고, 
나 또한 나의 길을 걸어왔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젊은 날의 순수했던 사랑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을 것이다.

가끔은 생각한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서로의 흰머리를 보며 웃음 짓고,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때처럼 한강변을 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어쩌면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기억 속의 그녀는 영원히 스물셋, 도서관 창가에서 책을 읽던 그 모습 그대로이니까.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그 시절의 추억은 멈춰 있다. 

각주구검의 우스운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증표이다. 
이제는 흘러간 강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내 삶의 한 페이지를 빛나게 만든다.

오늘도 나는 한강변을 걷는다. 
흐르는 강물을 보며,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첫사랑은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나는 안다. 
첫사랑의 의미는 그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수했던 시절이 우리의 인생에 남긴 빛나는 흔적에 있다는 것을.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이 아닌, 영원히 마음에 새겨둘 만한 소중한 추억으로 그녀를 기억하기에, 
나는 오늘도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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